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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면당한 어느 여성조합원의 편지

작성자 : 추천 작성일 : 2005.01.11 00:38:21 조회수 : 1073

이 글은 얼마전에 은이씨가 몇 명의 직원들에게 보내온 편지입니다.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 여러분과 함께 공람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정 은이입니다.

전자결재시스템 조직도에 제 이름이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근무했던 선배님의 아이디를 빌려서 마지막 인사 드리고 갑니다.
이제 정말 공직에서 배제되었구나.. 실감이 진하게 다가오네요.

솔직히 지금도 좀 멍해요.
이게 내게 일어난 일이 맞는건가.. 생각도 되구요.
제가 공감능력이 둔한 탓도 있겠지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초저녁 시간대가 주는
어스름한 기운위에 망치로 어딘가를 맞은 거 같은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상황을 엄마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나..
충격으로 다가올 텐데, 행여나 잘못되실까봐 불안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얘가 왜 이렇게 연락이 없나.., 궁금하셨죠?

엄마를 그저께 밤11시가 넘어서 이해시켰어요.
그동안에는 그 고민하느라 제 개인적인 아픔을 정확히 관찰할 여력이 없었는데,
요 며칠 추스리고 나니까 정말 이렇게 우스운 상황 속에서 당하게 되는구나..
당할 땐 당하더라도 형평성을 잃은 이 기준은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깁니다.

엄마가 그러세요.
"원주시청은 징계결과 발표됐다고 뉴스에서 떠드는데, 넌 어떻게 됐냐.."
"안좋게 됐다고, 엄마껜 죄송하다고, 이번 일이 이렇게 까지 불효가 될 줄 몰랐는데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엄마가 충격받으실까 걱정돼서 말 못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엄청난 꾸지람과 혼남을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엄마가 힘을 주시네요.

"거봐라...
진작에 엄마 말 들었으면 이런 고통 안당해도 될텐데 이미 엎질러 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엇하냐. 니 맘만 아프고 지켜보는 엄마 맘도 이렇게 아프지 않냐.
결과가 이렇게 났으니 다시 통지가 오는 날까지 미련 갖지 말고 접어라.
니가 공무원 계속 할 운이면 하게 되는 거고, 운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단합이 안되는 사람들이랑 파업한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니가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그 사람들은 안 그랬다.
입든 사람은 공무원이 배불러서 파업한다고 욕하는데 그 험한 걸 왜 만들었냐.
긴 세월로 보면 한 달, 일 년은 금방 간다.
마음 다잡아먹고 공부할 거 하고 힘들면 절에 다니면서 마음수양 같이하자.

너가 공무원 들어가는 날부터 이 날까지, 너로 인해 13년 동안 엄마는 행복했다.
이 번 경험을 니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남을 섣불리 믿지 말아라...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그만인데 산 입에 거미줄이야 쓸겠느냐..
되지 않을 거라면 괜한 미련 갖지 말고, 어디 학원 강사라도 하면서 지내라..
너가 입에 혀 처럼 잘하다가 노조하면서부터 엄마 속을 썩였다..
밤늦게 오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나가고..너 못지 않게 엄마도 애타고 힘들었다.
결혼이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나쁜 생각하지 말고 들어가서 그만 자라....
-
못난 딸 그렇게 안심시키시더니, 며칠째 잠 한 잠도 못 주무시고,
아침에 곡기도 끊으시고, 축져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언니, 오빠에게 전화통화하시는 말씀이 제 심장을 후려 팝니다.
"..나는 백만원, 천만원도 다 싫다. 막내가 직장 다시 들어가야 안심이 될 거 같다.
내가 벌받는거 같다. 과거에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고 있다.내 죄인것 같아서.."
*
내 파면이 내 자신을 넘어 왜?
가족에게까지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되며, 주위에 비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내가 업무과실로 인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엄마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어야 하나..

나보다 더 복무상태가 안좋고 게으르고 태만하며, 신의를 저버리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술먹고 하루 무단결근하는 사람은 봐주고, 왜 우리같이 약속지킨
사람들이 하루 무단결근의 이유로 공정성을 잃은 잣대에 의해 파면되어야 하는지..
나는 차치하고라도 10살 때부터 홀로 당당하게 키워주신 우리 엄마에게 이렇게
고통과 불명예의 짐을 지우게 해야 하는가..

엄마의 힘든 얼굴을 보면서
지금의 불효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자식인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 파면으로 인해 결국은 엄마의 명예도 실추시켰다는 이 생각이
저를 일어서서 법적투쟁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살면서 제일 곤혹스러운 순간이요..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결국 나에겐 잃을 것 밖에 없는 그런 최악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시 지휘부의 요구에 따라 내가 출근했을 경우
나는 노조와 조합원으로부터 나 혼자 살기 위해 약속을 저버린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이라는 원성을 들을 게 뻔했으며,

반대로, 파업에 동참할 경우
공무원으로서 시민에 대한 내 업무를 유기하게 되고
조직 내에서는 내 신분을 박탈당할지 모르게 되며,
그렇게 될 경우 지금까지 쌓아온 내 캐리어가 한 순간에 없어질 지도 모르는,
어쩌면 내 인생전체가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저는 가야할 길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라는 분야를 버리자..
그로 인해 내게 있을 고통이 있더라도 희생을 감수하자..
옳은 일이라면 저는 끝까지 당당하고 싶었습니다. 떳떳하고 싶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저는 파면되었습니다. 처음의 고민과 달리 결과론적으로 우습게요.

이번 징계결과를 놓고 분석해 보니 도대체 기준이 무엇인지 많이 헤깔렸습니다.
노조활동도 아니고, 간부여부도 아니고, 총파업 참여 여부도 아니고..
부당한 것을 보고 부당하다고 말한 것이 죄가 되어 낙인 됐다면
언제까지 약자가 당하기만 해야 하고 힘센 사람들에게 이용당해야 하는 것인지..
사람이 정승처럼 당하는 것과 개처럼 당하는 것은 많이 틀린 거 같습니다.

이번 일로 깨닫은 게 있다면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버려야 하는 문제임을 깨달았습니다.
‘버린다’는 선택은 포기하는 것을 지나 또 다른 고통을 감수해야한다는 것도 발견했구요.

솔직히,
우리 인생에 있어서 노조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노동3권도 내 인생에 중요한 목표는 아니니까요.
다만, 내가 공무원이니까, 내 직업과 연계된 부분에서
조직정화와 상승작용에 노조라는 게 필요하다고 모두가 공감을 했었고,
어차피 있어야 할 거라면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했기에,
누군가는 만들고 누군가는 일해 왔으며, 그들 중 일부는 간부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시간을 희생하면서 까지 활동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좀 답답한 것이. 아직도 총파업결과를 놓고
전공노 노선이 이러네, 지도부가 이러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좀 서글퍼요.
그렇게 한 치앞을 잘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다면 미리 말해주지 왜 이제와서 저럴까,
그렇게 말한 분들도 다 파업에 지지했으며 공무원노조의 필요성을 공감했을텐데..
지금은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게 더 현명할텐데...
그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아픔만큼 독해지며, 아픔만큼 철저히 현명해져 가는 거 같습니다.
-
앞으로 얼마간은
같이 해직당한 동료들과 소청과 소송준비를 하며 지내게 될 거 같습니다.
1년 동안은 계속 법률적인 검토와 투쟁으로 지내게 될 거 같아요.

가족들이 그래요. 파면은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을 때 가능한 게 아니냐고.
하루 무단결근 한 거 가지고 파면하는 건 가혹한 처벌이다.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걸 보면 혹시 헌법재판소까지 갈지도 모른다. 준비 찬찬히 해라.
시민에게 해를 끼칠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전국적으로 봤을 때 형평성에도 어긋나는데
그리고, 파업참가 여부가 불순한 것도 아니고, 동료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혼자 살아남지 않으려고 한 것이 왜 참작이 않되고 파면처분으로 되는지 이해가 않된다.
이 참에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니가 살아온 시절을 천천히 생각하며 지내라.
-
누군가 걷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게 이런건가 봅니다.
처음에 없었던 길을 우리가 밟아감으로 길을 내고, 나중에 다니기 쉬운 길을 만든다는게
이런 과정으로 생겨지는 구나.. 이런 생각들.., 요즘하고 있습니다.

*
다른 속엣 말은 이 담에 만나서 진하게 하기로 하구요.
무엇보다 외롭고 힘든 기간에 제게 용기주시고 마음으로 힘을 주신 거,
사무치게 고맙습니다..
특히, 직위해제 기간에 아무생각 하지 말고 스트레스 풀라고 50만원을 건네 준
내 친구에게는 우정을 넘어 내 친구의 영혼을 받은 것만 같았어요.
덕분에 제가 심하게 거칠어지지 않고 세상과 나와 화해를 하며 지냈던 거 같아요.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가족, 친구, 선후배들...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걸 하나 봐요.
직업있을 때 해버릴 걸, 때늦은 후회도 지금 합니다. 웃기죠 (하하)
여하튼요, 믿어주신 것 만큼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께요.

을유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고,
잃은 것 만큼 채워서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같이 약속해요..

결국엔 정의를 쥐고 있는 사람이 승리할 것이라 믿습니다.


정 은 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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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댓글 갯수 : 1개

    • 무명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2005-01-12 08: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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