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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투쟁의 섬 소안도

작성자 : 우리힘 작성일 : 2005.01.20 22:37:28 조회수 : 1441
해방 독립 투쟁의 섬 소안도 (우리힘 2005/01/1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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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의 고향 완도에 해방독립 운동의 섬이라 불리는 소안도가 있다. 소안도는 완도군 소안면에 속해 있으며 면 소재지인 소안도를 포함하여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소안면 중에서 가장 큰 섬이며 거주하는 주민들 또한 가장 많다.

소안도의 부속 도서 중 유인도는 당사도 횡간도 구도이며 무인도는 큰 여도 농서도 여망 태도 대서도 소구도 장수도 등이다. (장수 도는 북제주군 추자면과 관할권 분쟁중임)
이를 모두 합한 면적이 28.24 평방 km이며 이는 완도군 전체 면적의 7.2%이다.

△ 보길도 글씐바위에서 바라본 소안도

소안도는 고려 현종 9년(1080년)부터 영암군에 속하였고 달 목도 라 하였다. 1866년 청산 진을 설치하고 소안도의 군무와 행정을 청산 진에서 관할하여 오다가 1896년 완도군이 신설 설군 되면서 완도군 소안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김해 김씨 동복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지금의 월항리에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주하여 섬을 개척하며 살아왔다.

소안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임진왜란 발발 후 기존의 주민들과 각처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섬 내부의 치안질서 유지와 외부로부터의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주민자치 방위대를 결성하여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하였다는데서 편안한 곳이라는 뜻의 소안도라 이르던 것이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이 애향심 애국심으로 이어져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는 한반도 북부의 북청 동남부의 안동과 더불어 우리나라 해방독립 투쟁의 3대 전진기지로 완도군이 꼽혔는데 완도의 해방독립 투쟁의 중심에 소안도가 있었다.

소안도는 완도읍으로부터 남남서 쪽으로18.7 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안도의 도서로서의 지형적 특징으로서 면소재지인 북쪽의 비자리 마을과 남쪽의 가학리 마을을 연결하는 지역의 중간 지형이 마치 장고의 허리 부분처럼 잘록하여 소안 주민들은 이곳을 버던등이라 부른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등성이. 또는 바다 위로 뻗어있는 등성이 . 뻗은 등?)

이 버던 등을 깃 점으로 하여 북쪽은 비동리 비서리 이목리 월항리 북암리 등 5개의 큰 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가학리 맹선리 서중리 동진리 소진리 부상리 미라리 등의 7개의 큰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마을들을 중심으로 큰 마을에서 제재금 난 작은 마을들이 저마다 자리하고 있다.

소안도의 인구는 1976년에 9.005명이던 인구가 현재 3.000여 명에도 미달할 정도이며 소안도를 비릇한 소안면 전체의 마을별 인구변동 추세를 보면 소득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자연조건이 불리하거나 교육 의료 교통 문화 등의 생활 편익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의 인구감소율이 높았다. 또한. 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22%를 초과하는 초 고령 사회로 이의 폐해가 소안 도의 가장 큰 침체요인이라 할 수 있다.

소안도는 섬 대부분의 해안지역이 수산자원 보호구역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지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을 엄격하게 금지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 덕분에 섬 전체가 해양 자연사 박물관처럼 보전되어지고 있다.

△ 가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소안도
소안도의 모든 자연경관과 환경이 가치있고 귀하지만 그 중에서도 맹선리 와 미라리의 난대 상록 활엽수림은 그 풍치가 매우 뛰어나고 희소가치가 크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신흥리 백사장 또한 빼어난 명승이다.
어느 한 곳도 모자람이 없는 소안도의 빼어난 자연 환경유산은 오래전부터 시인 묵객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 왔으며 지금도 소안 팔경 등 시문학과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소안도의 천혜의 자연경관과 맑고 푸른 바다도 이곳에 터 잡아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해 오지 않았다면 그저 변방의 무인지경에 불과할 것이나 일제 36년 동안 전국에서도 가장 줄기차게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규모가 크게 가장 실천적으로 항일 해방 독립 투쟁을 전개해온 소안 사람들의 긍지와 민족애 조국애가 함께 해 왔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할 것이다.

1905년 치욕의 을 사 보호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조선의 명문 귀족 가문의 동의와 묵인을 유도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체제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전국 곳곳의 조선인들의 토지를 친일 명문가들에게 하사하였다.

이때에 소안도는 을 사 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 자작에게 하사 되었으며 소안 사람들은 대대손손 개척하고 일구어온 삶의 터전을 자기도 모르게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되자 주민들 모두가 분연히 일어나 힘을 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이지용 자작을 상대로 토지 반환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방법 중의 하나로 토지 반환소송도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법에 의하여 빼앗긴 땅을 그들의 법에 의하여 그들의 법정에서 소송을 통하여 원상회복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모두가 생각하였지만 소안 사람들은 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후 13여 년간의 줄기찬 법정 내외의 투쟁에 의하여 마침내 1922년 생명의 터전이요 민족혼이 깃들어 있는 소안도의 토지와 임야 등을 다시 돌려받았다.

이 투쟁과 소송의 경험과 결과를 신안군 하의 도의 토지 반환운동에 효과적으로 접목시켜준 이들 또한 소안 사람들이다. 이런 투쟁들을 전후하여 소안 사람들은 배달 청년회 수의 위친계 노농 대성회 살자회 신간회 완도지회 등을 결성하여 해방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안도의 주민들에게 구전되어오는 설화 전설 민요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해방독립 투쟁과 관련된 시와 노래 이야기들이 많으며 이는 한국의 타지역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중국인들과 우리의 선열들은 함께 힘을 합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이해관계가 달라져 현재의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이라는 국책 과제로서 우리민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협하고 있으며 청나라와 일본 제국주의의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 친일 진상 규명 법 등 과거사 청산 논쟁으로 1백 년 전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볼 일들이 많은 요즈음이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있는 담도 헐어내는 지구촌 시대에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말들이 고루해 보일지라도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소안도의 항일 운동사 유적지와 항일운동 기념관. 복원 공사중인 소안 사립학교. 준공을 앞둔 해방 독립운동 기념탑. 등을 한국인이라면 일생에 한번이라도 꼭 탐방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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